성격 나쁜 길고양이 같은 여자와
사랑해보셨나요?
“루이와 사귀면 해롱해롱과 안절부절이 거대한 파도처럼 교대로 찾아온다.
이 파도에 놀아나는 일 또한 사랑이라면 나는 틀림없이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제14회 야마모토 슈고로상 수상작*
관계 속에 흐르는 에로스를 아름답게 그려내는 작가 나카야마 가호의 대표작 『흰 장미의 심연까지』가 은행나무에서 출간되었다. 연애소설을 포함해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꾸준히 작품을 집필해온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사랑의 가장 뜨겁고도 서글픈 순간을 보여준다. 평범한 삶을 살아온 스물아홉 살의 도쿠코. 그녀는 어느 날 고양이처럼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연하의 여성 루이와 달콤하지만 파멸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작가 스스로 “젊을 때가 아니면 불가능한 기세와 절실함이 응축되어 있으며, 두 번 다시 쓸 수 없는 마지막 청춘소설”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이 사랑 이야기에는 국내 처음으로 소개되는 나카야마 가호의 가장 순수하고 치열했던 마서 음이 깃들어 있다. 섬세한 감정선을 따라 사랑의 환희와 쓰라림을 담아낸 『흰 장미의 심연까지』는 독자를 바닥없이 빨려드는 늪 같은 사랑의 세계로 이끌 것이다.
상세이미지
저자 소개
저자 : 나카야마 가호
1960년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와세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극단에서 연출가 및 배우로 활동했으며, 서른 살부터 회사에 다니면서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993년 《새우등 왕자》로 데뷔하여 1995년 《천사의 뼈》로 제6회 아사히신인문학상을, 2001년 《흰 장미의 심연까지》로 제14회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수상했다. 제127회 나오키상 후보에 오른 《꽃가람》과 《감정교육》 《마라케시의 심중》 등 농밀하고 정열적인 연애소설을 발표하면서 레즈비언의 리얼한 연애를 강렬하고 아름답게 그리는 작가로 알려졌다. 이후 작품세계의 폭을 넓히고자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미스터리물 《쾨헬》, 느와르물 《제로 아워》, 일본 전통 가면극인 노(能)를 소재로 쓴 작품집 《약법사》 《비가》, 다카라즈카 3부작 《남자 역》 《여자 역》 《은하 다리》 등을 발표했다.
역자 : 김재원
부산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 일본 와세다대학교 대학원 문학연구과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현재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다카하시 도시오의 『호러국가 일본』(공역), 다자이 오사무 전집 중 『유다의 고백』, 『생각하는 갈대』, 사이토 다마키의 『엄마는 딸의 인생을 지배한다』 등이 있다.
목 차
흰 장미의 심연까지 · 7
저자 후기 · 236
옮긴이의 말 · 241
출판사 서평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아수라와 황홀을 오가는 여자X여자의 사랑
루이를 생각하면 늘 초겨울 찬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때 나는 스물아홉이었고, 도쿄에서 회사를 다녔다.
루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설마 내가 여자와 사귀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내게는 늘 남자가 있었고, 나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_12쪽
찬 바람 부는 겨울밤, 뉴욕에 살고 있는 마흔셋의 가와시마 도쿠코는 서점에서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발견하고 10년 전 기억을 떠올린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고, 평범한 보통의 삶을 살아왔던 도쿠코. 그녀는 비 내리던 날 도쿄의 심야 서점에서 만난 연하의 여성 야마노베 루이와 파멸적인 사랑에 빠진다. 루이는 파격적인 내용의 첫 책으로 한 평론가의 극찬을 받은 무명의 소설가로, 질투와 애착이 극심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제멋대로지만 고양이처럼 거부할 수 없는 마력으로 다가오는 루이에게 도쿠코는 완전히 매료된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연애는 무척 뜨겁고 아슬아슬하다. 질투와 절망과 기쁨으로 가득 찬 연애. 육체적인 쾌락과 폭발하는 감정들로 점철된 연애. 서로를 붕괴하게 만드는 혁명적 연애. 두 사람은 불안과 행복의 가장자리 위에 위태롭게 서서, 가장 열렬한 감정과 가장 밑바닥의 감정을 동시에 경험한다. 사회 제도나 타인의 시선이 두 사람의 사랑에 가할 압력을 의식하기보다, 죽음과 바꾸어서라도 서로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이라는 듯 루이와 도쿠코는 오로지 사랑의 행위에만 집중한다. 덧없고도 강렬한 사랑에 몸을 맡긴 두 여자는 행복도 불행도 오직 서로에 의해서만 비롯되길 갈망한다.
난생처음 경험한 성의 황홀함과 견디기 힘든 인간성을 향한 증오가 동시에 들이닥쳐 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뒤흔들리고 엉망진창으로 휘저어져 맥없이 사랑의 덫으로 추락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세상 가장 제멋대로인 여자에게 몸도 마음도 흠뻑 빠진 후였다. _13쪽
“우리는 흰 장미의 심연을 보았다.”
―천국, 어쩌면 지옥의 시작일지도 모르는
농밀한 에로스가 뚝뚝 흘러넘치는 루이와의 관계를 통해 도쿠코는 처음으로 성의 기쁨을 알게 된다. 거칠면서도 정성스럽게 서로를 끝없이 탐닉하는 두 여자는 서로만이 줄 수 있는 쾌락을 탐구해나간다. 하지만 향기로운 식물들이 뾰족한 가시로 스스로를 보호하듯 아름다움 이면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기 마련이다.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껴안을수록, 루이와 도쿠코는 서로의 미세한 가시에 찔려 상처 입게 된다. 그렇게 사랑은 고통을 낳고, 사랑의 덫에 빠진 두 사람의 불안과 외로움 또한 커져만 간다.
“이런 거 이제 그만하자. 진짜 그만하자, 쿠치.”
“응, 알겠어. 이제 그만하자.”
이제 그만하자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어느새 딱 달라붙어 있었다. 우리는 훌쩍훌쩍 울면서 서로를 탐했다. 종국에는 쾌락인지 고통인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_179쪽
연인의 가시에 찔려 상처 입으면서도 서로를 꼭 끌어안는 두 사람을 통해 소설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그의 몸과 마음에 고여 있는 얼룩과 흉터, 보이지 않는 가시를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하나의 존재를 전부 품으려 애쓰는 사랑은 마냥 아름답기보다 잔인하고 지독할 수밖에 없다. 나카야마 가호는 루이와 도쿠코만의 고유한 사랑의 형태를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려 하기보다, 독자들이 그저 두 사람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 수 있도록 담담한 필치로 도쿠코의 기억을 써 내려간다.
나는 뇌 뒤편에 하얀 장미를 심은 적이 있다.
꽃을 피운 아이는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RUI가 루이였을 때, 꽃잎은 내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넘쳐흘렀다.
생명을 찌르는 가시와 함께. _11쪽
홀연히 사라진 루이를 찾으려 도쿠코는 이 세상의 막다른 곳 같은 장소에 이르게 된다. 사랑은 외국의 낯선 풍경을 번역하는 일이라는 듯, 도쿠코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속에서 연인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 그로부터 10년 후, 뉴욕의 서점에서 발견한 루이의 책은 도쿠코에게 과거의 감각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존재를 휩쓸고 지나간 루이의 흔적이 자신에게 영원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는 첫 출간으로부터 20년이 지난 뒤 일본에서 새롭게 발굴되어 복간된 『흰 장미의 심연까지』라는 책의 운명과도 닮아 있다. 이제 내 삶에 없는 사람이더라도 그와 나눈 사랑은 영원하다. 도쿠코에게 루이는 초겨울 찬 바람 소리로, 함께 먹던 스키야키의 뜨거움으로, 스며들던 피부의 부드러움으로, 네이비블루 더플코트로, 눈처럼 투명하게 바랜 머리칼로, 잊히지 않는 하얀 장미의 잔향으로 남아 있다. 단숨에 끌려드는 사랑처럼 독자의 품으로 곧게 다이빙하는 소설 『흰 장미의 심연까지』는 독자들을 누군가의 심연을 꿈꿨던 마음 너머로 데려다줄 것이다.
루이가 남자였다면,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하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스스로의 성(性)을 긍정하듯 루이의 성도 받아들이고 사랑했다. 성별이란 건 어차피 모자의 리본 같은 존재다. (……) 그러니 이거다 싶은 모자를 발견했을 땐 망설이지 말고 사버리는 게 좋다. 리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떼어버리면 그만이다. 중요한 건 우주 끝에서 미아가 되었을 때 누구와 교신을 하고 싶은가 하는 점이다. _11~12쪽